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2월 3일,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 === 유담리에서 후퇴하던 2개 연대의 부상자 수는 어마어마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부상자 1천 명에 도보로 이동하는 부상자 8백 명이었다. 중간에 합류한 폭스힐에 주둔해있던 F중대의 부상자를 태울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리가 없어 부상자들은 지프 본넷 위에 3명씩 눕혀놓아 추위와 총알 세례에 그대로 노출되게 해놓았고, 시신들은 대충 길가에 묻거나 트럭 흙받이(Fender), 심지어 대포의 포신에 묶어놓기까지 했다. 살갗을 찢어대는 혹독한 날씨에 극심한 피로로, 행군이 정지할 때마다 다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중공군도 상황이 좋지 않아 제대로 공격해오는 부대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저격병 한두 명이 공격해왔는데, 그때마다 미군은 [[공습]] 요청으로 처리했다. 중간중간 방어호에 있던 중공군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후레쉬를 비추면 눈이 불빛을 따라 돌아가서 그제야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도로 곳곳에 미군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중공군들이 몰려와 해병들과 함께 불을 쬐다가 몸이 녹으면 다시 산비탈로 올라가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23 km 짧은 거리를 무려 이틀 반 동안이나 행군한 끝에, 12월 3일 오후 7시가 다 되어 선두부대가 하갈우리 방어선 북쪽 끝 검문소에 도달하였다. 해병대는 며칠 동안 세면과 면도도 못해 몰골이 엉망이고 피곤에 절여져 있었지만, 그 시점부터 어느 하사관 1명의 페리스 아일랜드식 억양의 구령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행진하였고, 머리를 높이 들고 해병의 노래까지 부르며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몬테주마의 궁정에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 >우리는 조국의 전투에서 싸운다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최선봉에서 싸우며, >우리의 명예를 지킨다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부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네. >바로 미합중국 해병대. -[[Marines' Hymn|해병의 노래]] 참전용사들은 “당시 트럭에 실려 있던 전사한 해병들의 시신들이, 하사관이 외치는 집합 구령을 듣고 다시 살아나서 트럭을 내려와 행진대열에 합류할 것 같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로써 군사 전문가 드류 미들턴이 명명한 '''전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7연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이고, 아직도 뒤를 지키기 위해 유담리에 해병 5연대 2대대가 남아서 방어하고 있었고, 덕동고개 쪽의 터키힐에서는 7연대 3대대가 통로 확보를 위해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늦게는 유담리에 남아있던 해병포병 11연대도 철수하여 2대대만 남았다. 서부전선의 육군 2사단은 후위를 맡았던 대대가 통째로 철수하지 못하고 버려질 정도로 철수의 후위부대는 위험한 임무였다. 2대대는 중공군이 화낼까 봐 뻔히 보이는 적에게 총도 쏘지 못하게 하였다. 중공군은 해병포병대가 철수하면서 박살내어 폐허가 된 유담리 주변 가옥을 약탈하고 있었다. 선두 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다는 시점에서는 5연대 2대대와 앞서 철수한 부대가 후미와 1.5 km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철수할 때까지 터키힐에서 통로 확보하고 있던 7연대 3대대는 이미 첫날에 작살난 이후 여기저기에서 병력을 끌어들여 겨우 정수의 1/3 정도 채운, 사실상 중대급 부대였다. 어둠이 깔리자 이때까지 유담리의 구호소에 있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해병은 역시 해병이었다. 일부의 병력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며 후위부대의 후위를 맡으려고 지정된 진지로 이동하였고, 그제서야 대대장 해롤드 로이스 중령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E중대를 선봉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순식간에 터키힐을 지나쳐갔고, 그 바람에 터키힐의 7연대 3대대가 최후미를 담당하게 되었다. 공병대가 부서진 다리를 고치고, 연료가 떨어져 대포들을 포기하고 가는 악전고투 속에 하루가 지난 12월 4일 오후가 되어 이들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먼저 후퇴한 7연대처럼 이들도 산발적인 저항 외에 부대 단위의 공세를 받지 않았다. 유담리-하갈우리 통로만 12월 1일부터 4일까지 공격을 안 받은 것이 아니라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 모두 공격이 뜸했다. 중공군은 27일부터 초기 대공세 때 이미 작살나서 더 이상 공격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살아남은 병력도 너무 추워서 공격할 힘도 없었다. 무엇보다 해병항공단 코르세어기가 도로 양쪽에 네이팜탄으로 화력 터널을 만들어서 솜으로 누빈 옷을 입고 있던 중공군들은 심지처럼 타올랐다. 아마 하갈우리까지 육군 페이스 부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이동했다면 해병항공대가 지원하여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진호 동쪽의 육군은 위에서 언급했듯 장교들은 지휘하기를 포기하고 인가로 숨었고, 병사들은 저격당한 운전병 대신 운전대 잡기를 두려워했다. 그 바람에 제대로 된 공격도 받지 않고 알아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도망가다가 전멸해 버리는 추태를 일으켰다.] 한편 이날 하갈우리에 있던 7사단 작전처 윌리엄 린치 소령은 페이스-맥클린 부대 잔여 병력을 집계해서 10군단으로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는 남아있는 통합 대대는 앤더슨 중령이 지휘관, 위트 소령이 부지휘관, 도벨 대위가 작전장교이며 장교 40명에 사병 844명으로 합계 884명으로 나온다. 이중에서 325명은 후동리에서 탈출한 병력이며, 페이스 부대 소속이 228명, 31연대 3대대는 165명, 57포병대대는(대공포대 포함) 197명이였다. 이후 앤더슨 중령이 이끄는 임시 대대는 하갈우리에서 고토리와 황초령 정상까지 철수하는 과정에 다시 많은 인원이 죽거나 다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